움베르토 에코 <추의 역사>
미와 추의 속성은 종종 미학적 기준이 아닌 정치적, 사회적 기준에서 기인한다. 마르크스는 돈의 소유가 추를 보상해 줄 수 있음을 지적한다. "돈은 무엇이든 살 수 있고, 모든 대상을 소유할 수 있는 속성을 지니기 때문에, 소유할 가치가 있는 확실한 대상이다(...) 그러므로 내가 어떤 사람이며 무엇을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은 조금도 나의 인격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추하다. 하지만 나는 가장 아름다운 여인을 살 수 있다. 그리하여 나는 추하지 않은 사람이 되는데, 추의 효과, 추의 절망스러운 힘이 돈에 의해 제거되었기 때문이다. 개인으로서 나는 절름발이이지만 돈은 나에게 24개의 다리를 준다. 따라서 나는 절름발이가 아니다.(...)내가 가진 돈이 나의 모든 결점을 그 반대의 것으로 전환시켜 주지 않는가?"
이제, 돈에 관한 이런 견해를 권력 일반으로까지 확대한다면 우리는 몇 백 년 전 과거의 몇몇 군주들의 초상화들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분명 그들의 결점을 지나치게 강조할 의도가 없었을 화가들은 아첨하듯 그 초상화에 영원성을 부여했고, 심지어는 전력을 다해 그들의 용모에 품위를 부여하기까지 했다.
거리에서 이가 거의 다 빠진 사람을 본다고 상상해 보자. 우리를 심란하게 만드는 것은 그 사람의 입술이나 몇 안되는 남은 이들의 형태가 아니라, 그 몇 안 되는 이들 옆에 입 안에 <있어야 할> 나머지 이들이 없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그 사람을 모르고, 그의 추가 우리에게 감정적으로 영향을 주는 것도 아니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그 전체의 불완전성 혹은 불일치를 마주하고서- 그 얼굴은 추하다고 냉정하게 말할 자격이 있다고 느낀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미끈미끈한 벌레나 썩은 과일 조각으로 인해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혐오감에 감정적으로 반응하는 것과, 어떤 사람을 보고 비례가 맞지 않는다고 묘사하거나 어떤 초상화가 형편없이 그려졌다는 뜻에서 추하다고 말하는 것 (예술적 추와 형식적 추)은 서로 다른 행위인 것이다.
그리고 예술적 추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이지만, 적어도 고대 그리스부터 현대까지의 거의 모든 미학 이론에서는 어떤 형태의 추든 충실하고 효력 있는 예술적 묘사로 보상받을 수 있음을 인정해 왔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아리스토텔레스는 혐오감을 일으키는 것을 능숙하게 모방함으로써 미를 창조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으며, 플루타르코스의 <시의 경청에 관하여>에서, 예술적 묘사에서 모방된 추는 그대로 남지만 예술가의 정통함 덕택에 그것은 일종의 미의 메아리를 받는다는 구절이 있다.
미적 경험이 무관심적 관조를 수반한다는 것은 명백하지만, 그럼에도 사춘기의 불안한 십대들은 밀로의 비너스를 보는 것에서도 감정적 반응을 일으킬 수 있다. 이것은 추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서로 다른 세 가지 현상을 구분했다. <그 자체로의 추>, <형식적 추>, 그리고 <그 두 가지 모두에 대한 예술적 묘사>가 그것이다. 이제 우리가 이 책의 책장을 넘겨 나가면서 명심해야 할 점이 있다면, 특정 문화에서 앞의 두 가지 유형의 추가 어떤 것이었나를 추론해 내는 작업은 거의 항상 세 번째 유형의 증거를 토대로 할 때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고대 세계의 추
1. 미가 지배했던 세계?
우리는 대개 그리스 세계에 대해 고정관념으로 굳어진 이미지를 갖고 있다. 그러나 그 이미지는 신고전주의 시기에 그리스 세계를 이상화하면서 만들어진 것이다.
...비례를 구현하지 않는 것은 모두 추하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고대인들은 미를 이상화했고, 신고전주의는 고대인들을 이상화했지만 그 과정에서 그들이 잊은 것이 있었다. 이들 고대인들(종종 동방 전통의 영향을 받았던)은 그 자체가 불균형의 구현인 존재들, 모든 규범을 부정하는 존재들의 이미지들까지 서구 전통에 남겨주었다는 사실이다.
칼로스kalos(아름다운) +아가토스agathos(선한)=칼로카가티아kalokagathia(완벽함의 이상)
=>신사gentleman
=용기,풍채,능력,기품,운동을 즐기며 군인답고, 도덕성을 갖춘 사람
그리스 문화는 이상에 대한 이런 관점에서, 육체적 추함과 도덕적 추함의 관계를 다룬 방대한 문헌을 생산했다. 그럼에도 고대인들이 말하는 <아름답다>는 의미가 과연 즐거움을 주고 감탄을 자아내고, 눈길을 끌고, 그것의 형상 혹은 <영적>인 미, 영혼의 자질 덕택에 감각을 만족시키는 모든 것들을 일컫는가 하는 것은 여전히 분명하지 않다. 여기서 영혼의 자질이란 때론 육체의 미와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ex소크라테스)
헬레네-트로이아 원정/고르기아스
<>메넬라오스의 부정한 아내 헬레네
플라톤
존재=이데아의 모방
추=비존재
플로티노스
질료는 악한것이자 오류
추=물질세계
[엔네아데스]
추의 영혼은 (...)영혼이 보아야 할 바를 보지 못한다. 그 자신의 존재에 의지하지 못하는 이유는, 끊임없이 외부의 것들, 열등하고 밤보다 더 어두운 것들에 끌리기 때문이다.
불순하고, 감각할 수 있는 것들의 매력에 의해 모든 면에서 압도당한 그 영혼은, 육체의 많은 특성들과 혼합되어 있다. 그 영혼은 그 자신과는 다른, 물질의 형태를 받아들이는 까닭에, 그것에 의해 더럽혀지게 되며, 그 자체의 본질은 자신보다 열등한 것들에 의해 오염되게 된다.
*모든 철학적 논문들이 마찬가지이지만, (...)가치가 명명되고는 있어도 절대로 예를 통해서 명백하게 설명되는 경우가 없다.
(따라서 서문에서 말했다시피, 철학적 담론들과 예술가들의 구체적 창조물을 비교할 필요가 있다.)
남색pederasty
어원학적 의미 현명하고 성숙한 남자의 입장에서 젊은 청년의 미를 사랑
파우사니아스 에로스(판데미아의 에로스-남자=여자(여혐적의미bl)/ 아프로디테 우라니아(청년식게이))
소크라테스 플라토닉
그러나 파우사니아스는 젊은 남자란 모름지기 와꾸가 소크라테스라도 영혼이 고결하면 사랑해야 한다고 봤다
이는 사랑받는 남자(현명함을 대가로 육체지불)와 사랑하는 남자(가르침받는자, 가르치는자의 외모와 덕성에 반함, 자신도 현명함) 사이의 또하나의 성적, 철학적 동맹의 한 형식이다.
세카이는 남/여/안드로지니 가 잇엇는데 제우스가 각각의 성을 두개로 쪼갠 이후 동성애자, 이성애자가 생겻다
만약 누구나가 자신이 갖고 있지 않은 것을 욕망한다면, 에로스는 아름답지도 선하지도 않은 존재이며, 일종의 중간자적인 다이몬daimon, 영원히 얻지 못할 이상적 가치에 대한 갈망일 것임을 보여준다. 에로스는 페니아(penia, 가난)와 포로스(poros, 궁여지책) 사이에 태어난 아들이라 어머니의 비참한 외모를 물려받은 반면(그는 머리가 덥수룩하고 맨발에 집이 없다.) 아버지로부터는 선한 것에 <몰래 접근>해서 <사냥>할 수 있는 능력을 물려받았다.
이런 의미에서 아이를 낳으려는 욕망, 불멸에 대한 인간적 욕구를 충족시키려는 욕망은 에로스에게 전형적으로 나타난다. 그렇지만 여기엔 물리적인 자손 출산과는 별개로, 시에서 철학을 낳는 정신적 가치의 산출이 있으며, 이를 통해서 우리는 명예라는 불멸성을 얻는다. 이것은 곧 평범한 대중은 자식을 낳지만 영혼의 귀족성을 가꿔 온 사람들은 미와 지혜를 낳는다는 말로 바꿀 수 있을 것이다.
이어서 우리는, 잘생긴 알키비아데스가 술에 취해 갑자기 연회에 뛰어들어서, 자신은 소크라테스의 지혜를 공유하고픈 바람에서 그에게 몇번이나 자신의 육체를 제공했지만 소크라테스는 절대 육욕에 굴복하려 들지 않았으며 그를 순결한 상태로 놓아두었다고 말하는 대목에서, 그 사랑을 이해하게 된다.
(존나 비싸게 구네)
(...)결국 한 편의 대화에서조차 미와 추에 대한 서로 다른 관념들이 이렇게 대비되고, 따라서 추가 그저 칼로카가티아의 반대라는 단순한 개념을 더욱 복잡하게 만들어 버린다. 더욱이 그리스 문화는 이 복잡성을 항상 인식하고 있었다. 이솝(와꾸/정신반비례)에게 바쳐진 훗날의 찬사에서도 이것은 확인된다.
모든 사물에 어울리는 미의 등급이 존재한다
한 소녀나 한 마리의 암말, 하나의 항아리가 아름답다고 말할 수는 있지만, 이들 각각은 그보다 우월한 것에 대해서는 추하다는 것이다.
스토아학파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심지어 추조차도, 빵 한덩이에 생긴 균열 같은 불완전함조차도, 전체의 만족감에 한몫을 한다는 것을 인정했다. 다음 장에서 소개되겠지만, 이 원리는 추가 전후관계에 의해 상쇄되며 우주의 조화에 이바지한다는 교부 철학과 스콜라 철학의 관점을 지배하게 되었다.
2. 그리스 세계와 공포
그리스 세계는 추와 사악함에 사로잡혀 있었다.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 사이의 대립을 들먹일 필요는 없다. (...)기껏해야 거기에는 열정을 자극하는 음악의 역할과 관련된 모호한 단서가 있을 뿐이다. 그러나 훗날 피타고라스의 미학은 음악을 이성적 법칙, 비례와 좋화의 수학적 규칙에 대한 깨달음으로 보았다.
그럼에도 그리스 문화에는 나름의 지하 영역이 있었다. 영웅(오디세우스, 아이네이아스)들은 일찍이 헤시오도스가 그 공포를 설명했던 하데스의 무시무시하고 절망적인 안개 속을 탐험했다.
그리스신화는 가장 아름다운 존재조차도 <추한> 극악무도함을 저지르는, 한마디로 악이 지배하는 세계이다. 이 우주를 방황하는 끔찍한 존재들은 부정하다. 자연 형태의 법칙을 거스르는 잡종이기 때문이다.
세이렌, 폴리페모스, 하르피이아이, 스킬레와 카립디스 등등. 36p
수난, 죽음, 순교
1. 우주에 대한 <범미주의>적 관점
그렇지만 미술가들은 신들에게서 지고의 미라는 모델을 보았고, 이런 완벽함이야말로 올림포스 산의 거주자들을 재현한 조각상들이 추구했던 목표였다.(..)역설적이게도, 이 관계(그리스 미의 복잡성)-적어도 이 관계의 일정 측면들-는 그리스도교 세계의 도래와 함께 역전되었다. 신학적 형이상학의 관점에서 보면 우주 전체는 신의 작품이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며, 이 총체적인 미 덕택에 심지어는 추와 악까지도 어떤 면에서는 상쇄된다.
보상의 수단으로써, 우리를 위해 수난을 받았던 신의 인간적 표현인 그리스도는 최대의 굴욕을 당하는 순간의 모습으로 묘사된다.
(...)우주는 마르지 않는 광휘의 근원으로 나타난다.
악과 추는 신의 계획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부패는 손실이다.
(..)부패가 시작되기 이전에는 긍정적인 가치가 있었다는 의미가 된다. 만약 그런 가치 손실이 총체적으로 일어나면, 한 사물은 존재하지 않게 된다. 그러므로 악과 추는 ‘완전한 무’이며 존재하지 않는다.
44p
아우구스티누스->스콜라철학 다시 제기
범미주의관점에서 추를 정당화하다
그리고 죄악은 분명 사물의 질서를 파괴하지만, 이 질서는 벌에 의해 다시 세워지기 마련이고, 따라서 지옥의 저주받은 자들은 조화의 법칙을 보여 주는 예가 된다. 나머지 학자들은 추에 대한 인상을 우리의 지각의 결함에서 찾으려고 한다.
2. 그리스도의 수난
3. 순교자, 은둔자, 회개자
4. 죽음의 승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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